大村彦次郎の文士のいる風景 その8 田岡典夫

☆朝日新聞のコラムを翻訳したものです。原文は韓国語の下にある「原文」というピンクの文字をクリックすると出てきます。

오오무라 히꼬지로오의 문사가 있는 풍경-8 타오카노리오

  제2차 대전 동안에 단편소설[고집이 센 딸기]로 나오키상을 수상한 타오카 노리오는 메이지시대의 저명한 펴론가이던 타오카 료오운을 백부로 가지고 토사-코오치에서는 풍족함으로 알려진 자산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었을 때에 파리여행도 하고 귀국한 뒤에는 제6대 키쿠고로오의 배우학교에 다니는 등, 색다르고 엉뚱한 청춘을 보냈다.
  코오치항의 입구에 있는 작은 섬에 지카타비(노동자용 작업화)의 큰 입간판이 생겼을 때, 그것이 우라토만의 풍치를 해치는 갓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며, 타오카가 솔선해서 철거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일이 잘 진척되지 않아서, 결국 견딜 수 없게 된 타오카가 그 섬을 통째로 매수하고나서 간판을 철거했다. 있는 사람이어서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라는 소리도 들렸고, 한편으로는 보통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는 비웃음을 사기도했다.
  타오카는 원래 토사사람 특유의 반골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세상의 명성을 싫어하는 담백하고 유유히 마음내키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문단에서는 키쿠치 칸이나 고향의 선배이던 타나카 코오타로오의 보살핌과 훈도를 받았다. 시바-니혼에노키(두 그루 팽나무)에서 살던 하세가와 신의 집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전쟁이 끝난 지 2,3년 후 부터였다.
  하세가와를 처음 만났을 때 타오카는 “저는 키쿠치선생님과 타나카선생님, 두 분이나 선생님으로 모시고 있기에, 당신을 선생님으로 모시지 않겠습니다” 라는 뻔뻔스러운 인사를 했다. 하세가와는 웃으면서 “그래? 좋아”하고 응했다. 그런데 자주 하세가와를 만나면서 그의 인격에 접하다가 어느새 타오카는 앞서 한 말을 번복하여 하세가와를 ‘선생님’으로 부르게 됐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곤쿠로오 여행기] 등이 있다. 쇼오와57(1982)년 4월에 아타미에 있던 자기 집에서 사망. 73세 였다.




大村彦次郎の文士のいる風景 その8 田岡典夫

 戦時中、短編「強情イチゴ」で直木賞を受賞した田岡典夫は明治の高名な評論家田岡嶺雲を伯父にもつ、土佐高知では恵まれた資産家の息子として生まれた。若いころ、パリに外遊し、帰国後は6代目菊五郎の俳優学校に学ぶなど、風変わりで無鉄砲な青春を送った。
 高知港の出口にある小島に、地下足袋の大きな立て看板が立てられた時、浦戸港の風致を害すること甚だしい、と田岡が先頭に立って、撤去運動をおこなったことがあった。だが、らちがあかず、結局、業を煮やした田岡が島を丸ごと買収して、看板を取り除いた。金があったから出来た、ともいわれたが、世間の金持ちはそんなことはしない、と笑われもした。
 田岡にはもともと土佐人特有の反骨心があったが、一方、名聞を好まぬ、淡泊で飄逸な気質の持ち主だったから、文壇では菊池寛や郷里の先輩田中貢太郎に可愛がられ、その薫陶を受けた。芝二本榎の長谷川伸邸へ出入りするようになったのは戦後3,4年してからだった。
 長谷川と初対面の時、田岡は「私は菊池、田中両先生と、2人まで先生と呼ぶ方がありますから、あなたに向かっては、先生と申し上げません」と、臆面もないあいさつをした。長谷川は笑って、「ああ、いいよ」と答えた。だが、長谷川にしばしば会い、その人格に触れると、田岡はいつの間にか前言を翻し、長谷川を「先生」と呼ぶようになった。代表作に「権九郎旅日記」など。昭和57年4月に熱海の自宅で没。73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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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shinayuu | 2006-09-15 10:45 | 翻訳 | Trackback | Comments(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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